The unseen in the seen: 보이는 것 속의 보이지 않는 것
김현진
Visual Artist & Photographer
사진 연작 · 7점 · 2025
Email: kimhyunjinfo@gmail.com

작품 설명
The unseen in the seen은 서양 미술사의 대표적인 회화들을 오늘의 인물 사진으로 다시 바라보는 연작이다. 르네 마그리트, 주세페 아르침볼도,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그림들 속 제스처와 구도, 분위기를 빌려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과 옷, 태도로 새롭게 번역한다.
이미지들은 의도적으로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붙잡히지 않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어렴풋이 본 적 있다고 느끼는 그림의 잔향 같지만, 막상 기억 속 이미지와 눈앞의 사진은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 그 미묘한 어긋남을 일부러 드러내면서, 연작은 우리가 무엇을 자동으로 안다고 느끼고, 무엇을 보지 못한 채 지나치는지 질문한다.
이 연작이 궁금해하는 것은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어디까지 그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가깝다. 나는 정체성이 얼굴뿐만 아니라 자세, 몸의 무게 중심, 옷차림, 천의 질감, 손과 다리의 위치, 서로 간의 거리, 놓여 있는 사물과 배경 같은 요소들에서 함께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각 사진 속 인물들은 거장의 작품을 흉내 내는 모델이라기보다, 오래된 이미지를 자기 몸과 옷,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환경을 통해 다시 협상하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에 가깝다.
과거의 유명한 이미지는 수없이 복제되면서 맥락이 지워지곤 한다. The unseen in the seen은 그 익숙한 그림들을 오늘의 몸 위에 다시 불러내면서, 오늘의 시선이 그 이미지를 어떻게 이어받고, 다르게 해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포개어 보는지를 살펴본다. 패션, 질감, 제스처, 태도는 과거 작품을 단순히 인용하는 장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람들을 통해 그 역사가 다시 읽히는 방식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 연작은, 관객이 한 번쯤 속도를 늦추고 프레임 안의 작은 결정들—자세, 옷, 시선, 간격, 배경—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길 요청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얽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이미지의 역사로 남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작가 소개
김현진(1994년 인천 출생)은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사진가다. 주로 사진과 의상을 매체로 작업하며, 사람들이 옷차림과 제스처, 타인의 시선 앞에서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드러내는지에 관심을 둔다.
한국과 캐나다에서 사진·비주얼 미디어를 전공했고, 서울·토론토·뉴욕·런던·파리를 오가며 패션 사진의 시각 언어를 참고하되 상업 작업과는 거리를 둔 독립적인 시각 예술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왔다. 최근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2025)은 미술사 속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오늘의 인물과 몸을 통해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옷을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언어이자 물질로 다루며 인물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김현진의 작업은 런던 에스파시오 갤러리(Espacio Gallery), 맨체스터 뱅클리 갤러리(Bankley Gallery), 벨파스트 익스포즈(Belfast Exposed) 등에서 전시되었으며, 패션을 문화적·담론적 장으로 다루는 독립 매거진들에도 소개된 바 있다.
01. 르네 마그리트 <The Son of Man, 1964>을 바탕으로

The Screen of Man, Hyunjin Kim, 2025

The Son of Man, René Magritte, 1964

이 사진은 얼굴 대신 화면을 내세우는 오늘의 초상을 다루는 작업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The Son of Man〉을 오늘의 전신 초상으로 다시 가져오되, 공중에 떠 있는 초록 사과 대신 인물의 얼굴을 스마트폰이 가리고 있다. 뒷면에는 모두에게 익숙한 한 입 베어 문 사과 로고가 보인다. 줄무늬 재킷, 테일러드 반바지, 허리에 묶은 붉은 타이, 빨간 하이힐 샌들까지 수트 차림의 몸은 온전히 드러나 있지만, 가장 사람을 알아보게 하는 얼굴은 매끄러운 화면으로 지워져 있다. 작품 제목 〈The Screen of Man〉은 마그리트의 원제를 비트는 동시에, 지금은 몸과 시선 사이에 항상 얇은 디지털 스크린이 끼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사진은 오늘날 자아이미지가 어떻게 기기와 옷차림, 제스처를 통해 연출되는지를 바라본다. 인물은 일하러 나온 사람처럼 단정하고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보여줘야 할 자리를, 나를 대신해 보여주는 휴대전화 뒤에 숨기고 있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이미지는 두 가지를 묻는다. 첫째, 남들 앞에 설 때 어떤 부분은 과장해 보여주고, 어떤 부분은 끝까지 숨기려 하는가. 둘째,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세, 스타일링, 액세서리 같은 요소만으로 한 사람에 대해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는가. 이 사진은 그 질문을 프레임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험해 보는 장면이다.
02. 주세페 아르침볼도 <The Librarian, 1566>을 바탕으로

The Libra-rian, Hyunjin Kim, 2025

The Librarian, Giuseppe Arcimboldo, 1566

이 사진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회화 〈The Librarian〉을 오늘의 인물 사진으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책들로 얼굴을 만든 원작과 달리, 이 사진 속 인물은 패션·사진·시각문화 관련 서적들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마치 지식과 이미지가 실제로 몸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고 있는 자세다. 인물의 몸과 책 더미는 하나의 조각 같은 실루엣을 이루며, 아카이브와 자세, 그리고 정체성의 경계를 겹쳐 놓는다.
이 구성은 오늘날 한 사람의 정체성이 직접 겪은 경험만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소비해 왔는지에 의해서도 형성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잡지, 작품 이미지, 시각 문화, 우리가 무심코 축적해 온 레퍼런스와 역사들이 여전히 몸 안에 쌓여 있다는 것.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사진은, 우리가 자신을 드러낼 때 그 뒤에 어떤 보이지 않는 서가가 받치고 있는지를 비춘다. 이 작업은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봐 왔고, 또 무엇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지가 현재의 몸짓과 자세, 그리고 어떻게 서 있는가라는 방식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음을 시사한다.
03. 미켈란젤로 <Pietà, 1498-1499>를 바탕으로

Shared Pietà, Hyunjin Kim, 2025

Pietà, Michelangelo Buonarroti, 1498-1499

이 사진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의 구도를 빌려와, 두 명의 동시대 인물로 다시 구성한 작업이다.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의 몸을 품에 안고 있는 장면 대신, 상반신이 드러난 남성이 흰 옷을 입은 여성의 무릎 위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다. 여성의 팔은 그의 몸무게를 조용히 받아내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과 시선은 관객에게 선명한 감정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교회 내부도, 십자가도, 상처도 보이지 않고, 익숙한 포즈의 구조와 지금 여기의 몸, 옷, 천의 주름만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나는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신의 희생 대신 오늘의 관계 속에서 오가는 무게를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긴 하루가 끝난 후처럼 축 늘어진 몸, 그 몸을 아무 말 없이 떠받치는 사람, 몸과 몸이 맞닿은 자리의 온도는 애도·위로·돌봄·번아웃·친밀함 등 여러 감정을 동시에 불러온다. 그러나 사진은 둘의 관계를 끝까지 규정하지 않는다. 연인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 혹은 잠시 서로의 짐을 나눠 들고 있는 동료인지 알 수 없다. 관객은 인물들의 자세, 무게가 실린 방향, 손이 감싸는 방식, 흰 드레스의 질감 같은 단서들을 가지고 스스로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사진은, 고전 조각의 유명한 구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되, 맥락과 언어를 제거한 상태에서 얼마나 많은 해석이 여전히 생성되는지를 시험하는 장면이다. 전통적으로 슬픔과 헌신의 상징으로 읽히던 구도는, 오늘의 젊은 몸 위에 올려졌을 때 함께 버티기, 조용한 의존, 말 없이 기대는 순간 같은 다른 이미지로도 겹쳐 보인다. 이렇게 더 넓은 해석을 허용하는 상태에서, 관객은 무엇이 실제로 보이고, 무엇은 보이지 않는데도 내가 스스로 채워 넣고 있는가를 자각하게 된다.
04. 주세페 아르침볼도 <Summer, 1563>를 바탕으로

Sour Summer, Hyunjin Kim, 2025

Summer, Giuseppe Arcimboldo, 1563

이 사진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Summer〉를 오늘의 인물 사진으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과일과 곡물로 얼굴을 구성하던 원작 대신, 여기에서 계절은 옷과 질감으로 등장한다. 꽃무늬 드레스, 얇고 패턴이 있는 양말, 의자에서 흘러넘치듯 쏟아지는 식물성 섬유들이 과하게 자란 들판처럼 보인다. 인물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힘이 빠진 자세로 앉아 있고, 약간 삐친 듯한 표정은 정성스럽게 꾸민 스타일링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제목 〈Sour Summer〉는 아르침볼도의 원작을 비틀어, 겉으로는 풍성해 보이지만 어딘가 산미가 도는 계절의 감각을 암시한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사진은, 여성성과 즐거운 계절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패션을 통해 연출되는지를 바라본다. 우리는 종종 여름을 가볍고, 화사하고, 걱정 없는 계절로 상상하지만, 이 사진 속 몸은 밝은 옷차림과 달리 지쳐 있고 어딘가 버거워 보인다. 이 작업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여성, 패션 이미지의 주인공, 계절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기대되는 모습이 실제 상태와 어긋날 때, 그 틈이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 답을 얼굴보다 작은 것들에서 찾는다. 구부정한 자세, 앞으로 쏠린 어깨, 힘이 빠진 손과 다리, 드레스와 섬유가 몸 주변에서 과하게 번져 나가는 방식 같은 요소들이 모두 그 불일치를 기록한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스타일링된 여름을 보여주려는 장면이지만, 몸은 그 안에 담기지 못한 피로와 무기력을 동시에 흘려보낸다. 관객은 이 작은 단서들을 따라가며, 이 인물이 기대받는 여름의 이미지와 실제로 느끼는 여름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05. 카라바조 <Boy with a Basket of Fruit, 1593>을 바탕으로

Fruit Held Close, Hyunjin Kim, 2025

Boy with a Basket of Fruit, Caravaggio, 1593

이 사진은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을 오늘의 인물 사진으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원작에서 소년은 가슴 높이까지 치켜든 바구니를 안은 채 관객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드러난 어깨와 넘칠 듯한 과일은 종종 관능성과 풍요의 상징으로 함께 읽힌다. 이 사진에서는 그 바구니가 사라진다. 대신 흰 메시 탱크톱과 붉은 프린트 진을 입은 가느다란 인물이 작은 오렌지 몇 개를 자신의 몸에 바짝 끌어안고 있다. 팔은 꼭 끌어안듯 가로질러 접혀 있고, 과일은 피부와 옷 사이에 끼인 채 버틴다. 어두운 배경과 부드럽게 퍼지는 빛은 원작의 친밀한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자세는 훨씬 닫혀 있고 표정은 더 조용하고 읽기 어렵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이미지는, 원작에서 화면 바깥을 향해 과일을 내밀던 제스처를 인물의 몸 안쪽으로 옮겨 놓는다. 더 이상 과일이 밖으로 내어주는 선물처럼 보이지 않고, 몸 안으로 모아진 채 머문다. 이 인물은 그것을 보여줄지, 지켜낼지, 그저 무게를 견딜지 스스로도 망설이는 사람처럼 보인다. 교차된 팔은 동시에 품어 안는 자세이자 경계선이 된다. 누군가에게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 지점 이상은 넘겨주지 않으려는 태도 — 넘쳐 흐르던 과일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나를 내어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온다.
이 사진에서 카라바조의 제스처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제스처가 향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과일 바구니를 내밀던 소년과 달리, 이 인물은 무언가를 안으로 끌어안은 채 스스로를 감싼다. 패션과 젠더가 모호하게 섞인 몸은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무언가는 끝까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이 가진 것의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무엇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채 남아 있는지.
06. 얀 반 에이크 <The Arnolfini Portrait, 1434>을 바탕으로

The Assumed Couple, Hyunjin Kim, 2025

The Arnolfini Portrait, Jan van Eyck, 1434

이 사진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초상〉을 재구성한 작업이다. 원작에서 남성과 여성은 가구와 개, 샹들리에, 거울 등이 놓인 방 안에 나란히 서 있다. 맞잡은 손과 세심하게 배치된 사물들은 이들을 결혼식, 계약, 기념의 순간에 서 있는 중요한 한 쌍으로 읽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사진에서는 그 내부가 통째로 사라진다. 어두운 배경 앞에 두 명의 젊은 인물이 정교한 의상을 입고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 인물은 왕관 같은 머리장식과 베일, 부피감 있는 검은 스커트를 입었고, 왼쪽 인물은 초록 체크 로브와 러플 셔츠, 줄무늬 바지를 입고 있다. 검은 장갑을 낀 한 손은 상대의 손을 잡고 있지만, 다른 한 손은 허공에 떠 있는 채 제스처와 정지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방, 가구, 개, 거울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두 사람의 옷차림과 자세, 몸 사이의 작은 거리만이 둘의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사진은, 관계를 설명해 주는 말과 사물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무엇을 근거 삼아 두 사람 사이를 읽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첫눈에는 어떤 의식을 앞둔 한 쌍처럼 보이지만, 사진은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 공백 덕분에 관객은 둘의 공식적인 이름표보다, 포즈와 간격, 손이 닿는 방식 같은 요소들에 더 의지해서 두 사람의 거리를 가늠하게 된다.
이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은 표정보다 몸의 배치와 간격, 손을 잡는 힘,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정도다. 관객은 장갑 낀 손과 맨손, 층층이 쌓인 옷의 무게, 치맛자락과 바지의 방향 같은 작은 디테일을 따라가며 두 사람 사이의 온도와 긴장을 스스로 상상해 채운다. 여기서 진짜 보이지 않는 것은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각자가 머릿속에서 조용히 만들어내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은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과 사실은 추측에 기대어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슬며시 드러낸다. 그리고 옷과 자세, 작은 제스처만으로도 친밀감이 얼마나 쉽게 연출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많이 감춰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07. 얀 반 에이크 <The Arnolfini Portrait, 1434>을 바탕으로

The Assumed Partner, Hyunjin Kim, 2025

The Arnolfini Portrait, Jan van Eyck, 1434

이 사진은 〈The Assumed Couple〉과 짝을 이루도록 기획된 작품으로, 마찬가지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초상〉에서 출발한다. 가구와 소품이 가득한 실내에서 두 사람이 서 있던 장면 대신, 여기에는 어두운 스튜디오 배경 앞에 한 인물만이 남아 있다. 인물은 왕관을 닮은 머리 장식과 베일, 여러 겹의 진주와 십자가 목걸이, 검은 레이스 톱, 장식적인 벨트로 조여진 부피감 있는 주름 스커트를 입고 있다. 팔은 등 뒤로 모아 상체를 단단히 조이고 있고, 얼굴은 화면 밖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빛을 향해 옆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몸 주변으로는 왕족, 신부, 성인(聖人)을 떠올리게 하는 종교적·의례적 코드들이 겹겹이 쌓이지만, 그 어느 하나로도 이 인물을 완전히 규정하지는 않는다.
연작 〈The unseen in the seen〉 안에서 이 사진은, 더블 포트레이트의 한쪽 자리에 서 있던 몸으로 시선을 옮겨 놓는다. 짝이 되는 상대와 방 안의 사물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이 사람에 대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의상, 자세, 시선의 방향뿐이다. 관객은 베일과 목걸이, 허리를 조이는 벨트, 치맛자락의 부피감 같은 요소들을 따라가며, 누군가의 아내일까, 동반자일까, 의식의 주인공일까 같은 역할을 떠올리게 되지만, 사진은 끝까지 그 역할을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역할의 껍데기는 남겨둔 채, 그 안을 채우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빈칸으로 남겨 둔다.
옆으로 돌아간 얼굴과 등 뒤로 감춰진 팔은 이 인물을 화면 한가운데 세우면서도, 동시에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모든 것이 잘 보이는 것 같지만, 정작 이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계속 말해지지 않는다. 이 작업은 관객에게 조용히 묻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의 삶에서 어느 부분까지인지, 그리고 역할의 외형만 또렷이 남았을 때 그 너머의 개인은 얼마나, 어디까지 상상해 넣을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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